허리케인 어마가 살려 준 마이애미
Posted 2017. 9. 14. 06:54
정말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지난 한달여간 주말도 없이 일하던 와중 카테고리 4 허리케인이 온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렸다 ㅠ
D-4
태어나서 자연재해는 겪어본 적이 없는데다가, 일에 지쳐서 사고회로가 멈췄는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전기 나가면 남은 프로젝트는 어쩌지? 라는 생각. 그렇게 그냥 일 걱정부터하면서 멍때리다가.. 아파트 관리인에게 주변에 호수가 있기 때문에 이 곳이 홍수가 잦은 지역이라고 얘기를 들었다;; 유리창은 모래주머니로 꼭 막아두라고..
그제서야 부랴부랴 철물점으로 향했고 모래주머니는 물론 두꺼운 비닐, 청테이프등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비 물건이 동 난 걸 보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주지사가 집은 다시 지을 수 있으니 목숨부터 구하라며 대피를 권고했다. 자연재해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때엔 뉴스에 자연재해로 피해가 나면 "왜 대피하라는데 말 안듣고 있다가 다치지?"라고 쉽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정작 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가주택도 아니고 작은 아파트일 뿐이지만 열심히 가꿔온 내 집이니까 떠나기가 아쉬웠다.
언젠가 일본에 미니멀리즘이 발달한 이유가 자연재해가 하도 많아서일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스쳐지나간 얘기였지만 이젠 뼛속 깊이 이해가 갔다. 잃을게 많으면 두려워 지는 법. 나는 물질주의(?)라서 미니멀리스트는 꿈도 꿀 수 없지만 미니멀리즘과 킨포크 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D-3
대피할 땐 대피하더라도 집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두고 싶어 몇날 며칠 철물점과 마트에 갔지만 물품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남편도 차에 주유를 하기 위해 매일 밤 자정에 주유소를 일곱, 여덟 군데 씩 돌아다녔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결국 새벽 3시까지 기다려 주유에 성공했다.
결국 난 작업하던 프로젝트 둘 중 하나는 양해를 구해 하차 했다. 나머지 하나는 클라이언트의 배려로 마감일을 늦출 수 있었다. 전기가 일찍 끊어질걸 고려해 할당량을 끝내기 위해 밤 10시까지 일하고 내 나름대로 준비에 나섰다.
장에서 간신히 구한 마지막 청테이프 하나로 유리창에 테이핑을 하고 덜컹거리는 샷시에 열심히 신문지를 접어 끼어 놓았다. 철창이나 나무판을 붙이는 작업에 비하면 허접하기 짝이 없지만 힘을 가해도 더이상 흔들리지 않으니까 내 나름대로는 매우 뿌듯하고 왠지 든든해졌다ㅎ
청테이프 주제에 귀엽다... 귀여워서 안 팔렸던 걸까? 마지막 남았던 고래 청테이프ㅋ
신문지를 지난주에 다 내다버려 밖에 쓰레기통 뒤져 찾아온 것은 비밀^^;;
D-2
이미 고속도로는 꽉 막혀 대피하기엔 늦은 감이 있어서 집에 남기로 했다. 애완동물을 받는 대피소에 가기 위해선 마이애미시에 앙쥬를 등록 시켜놨어야 하는데 그런 게 있는 줄 몰랐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이젠 그냥 집에서 기도를 하는 수 밖엔 없었다.
세상 편하게 조는 앙쥬.. 언니가 세상이 무너져도 너 하나는 지켜줄게 ㅠㅠ
D-1
아침 일찍 철물점에 갔지만 역시 아무 것도 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후에 정말 기적적으로 허리케인 예보가 방향을 틀었다! 원랜 정통으로 마이애미를 향해 달려 들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서쪽으로 가버린 것 +_+
D-DAY
허리케인 눈에선 벗어났지만 혹시 모르니 예정대로 창문에 붙일 신문지와 물을 준비했다. 바람이 거세지면 붙일 작정이었다.
정오가 되니 전기가 나갔다. 촛불을 키고 남편하고 카드게임을 시작했다.
우노는 내가 이기고 포커는 남편이 이기고..
카드 게임을 하면서 창밖으로 동태를 살폈지만 비도 그닥 많이 내리지 않고, 바람만 조금 불 뿐이었다. 길다란 야자수만 휘청이고 짧뚱한 야자수는 의외로 꽂꽂히 서 있는 걸 보니 왠지 멋있었다 (호오)
정말 기적적으로 허리케인이 비껴가서 전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준비해 두었던 신문지도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D+1
우리 집은 바닷가에서도 적당한 거리고, 또 허리케인이 지나갔던 서쪽으로도 너무 가깝지 않은 딱 중간에 위치해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별 준비를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허리케인이 정통으로 왔으면 무사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냥 운이 좋게도 허리케인이 우릴 살려줬다고 밖엔 설명이 안 된다.
창문에 껴놓은 신문지를 빼니 반쯤 젖어있었다. 그래도 뭔가 방법을 해놓은 게 유용했다고 느껴져 뿌듯했다ㅎㅎ
전기도 만 하루만에 돌아왔다. 3,800만 가구가 아직도 전기가 없다던데 정말 운이 좋았다. 우리집 발코니에선 안 보여서 몰랐는데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니 나무가 꽤 많이 쓰러져 있긴 했다.
도로로 쓰러진 큰 나무는 전키톱으로 잘라 가고, 땅채 들린 뿌리만 남아있다;
뉴스를 보니 바닷가 쪽은 홍수가 나서 피해가 심각한가 보다. 3일째지만 밖에 나가면 신호등도 안 들어오고 가게도 모두 문 닫은 상태여서 아직 일상으로 복귀됐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집에 박혀 있으면 전혀 불편함을 모르겠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 ㅠㅠ
허리케인 어마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분들의 일상이 하루 빨리 복구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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